2000. 05. 『조선시대, 삶과 생각』,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유교: 종교적 염원과 세속적 가치의 이중주


김    현*1)


1. 유교(儒敎)의 종교성(宗敎性)

  - 유교를 종교로 보지 않는 시각

  - 유교의 종교성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 증거

2. 조선시대의 종교적 제례(祭禮)

  - 조정(朝廷)에서 행한 제례

  - 사대부가(士大夫家)의 제례

3. 자연의 신[天神]에 대한 의례

  - 유교의 귀신관(鬼神觀)

  - 천신(天神)에 대한 제사(祭祀)가 담고 있는 의미

4. 조상의 신[人鬼]에 대한 의례

  - 유교의 사생관(死生觀)과 제사의 의의

  - 유교적 제례에서의 영원성(永遠性)의 추구

5. 유교의 한계와 의의

  - 초월적 자유의 제약

  - 현실과 영원의 조화


1. 유교(儒敎)의 종교성(宗敎性)


- 유교를 종교로 보지 않는 시각


  초인간적 초자연적인 힘에 대해 인간이 경외하고 존숭하며 신앙하는 일의 총체적 체계를 종교라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통시대에 신앙해 온 종교라고 하면 당연히 불교(佛敎)와 유교(儒敎)를 든다. 그러나 그 가운데 유교가 과연 종교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원래 종교라는 말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써 온 용어가 아니다. 그것은 서양에서 온 ‘Religion’이라는 단어의 번역어로서 생겨난 것이며, 따라서 종교라는 말은 처음 만들어진 때부터 서양 사람들이 이해하는 종교의 의미가 내포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서양인의 종교라 하면 두말할 필요 없이 기독교(基督敎)를 말하는 것이요, 기독교의 특성이 종교의 필수 요건인 양 이해되게 되었다. 이를테면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인격신(人格神)의 존재라든가 인간의 영혼불멸(靈魂不滅) 같은 것이다. 신의 존재나 영혼불멸성 같은 것을 종교의 요건으로 삼는다면, 유교를 가지고 종교라고 하기에는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독교적 기준에서 평가함이지 우리 전통의 기준에서 보는 얘기가 아니다.

  동양과 서양을 불문하고 인간은 우리 인간 존재보다 강하고 영원한 것에 의존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져왔다. 그 강하고 영원한 것에 의지함으로써 얻으려 한 것은 종교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차이라고 하는 것도 스스로 자신의 나약함을 자각한 인간이 초인간적 존재에 대한 신앙을 통해 강하고 영원한 것에 일체가 되려 한 공통점을 생각하면 그렇게 두드러지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구원을 통한 영생(永生), 불교는 깨달음을 통한 해탈(解脫)에 목표를 두는 데 반해, 유교는 자연과 인간을 꿰뚫는 보편적 섭리(攝理)에 합일하는 성인(聖人)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한다. 이점에서 기독교나 불교가 초현세적(超現世的)인 성격이 강한 반면 유교는 다분히 현세적(現世的)이라고 할 수 있다.  ‘성인(聖人)’이라고 하는 것은 내세(來世)의 존재가 아니요, 살아있는 인간으로서의 인격적 완성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성인이 되기를 기약하며 합일하기를 추구하는 그 보편적 섭리는 현실 세계의 원리로만 제약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과 자연을 관통하고 삶과 죽음의 세계를 꿰뚫는 원리인 것이다. 이 점에서 유교가 추구한 것은 ‘현세 중심적’인 특징을 갖는 것이 사실이되, 오로지 ‘현세적’이라고만은 할 수 없으며, 현세 중심이면서도 현실 세계를 제약을 넘어서는 초현실적 면모를 함유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 유교의 종교성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 증거


  인간보다 강하고 영원한 보편적 존재를 상정하고 그것을 경외(敬畏)하고 존숭(尊崇)하였다는 점에서 유교를 신앙한 우리의 선조(先祖)들은 그 어느 여타 종교인들보다 더 종교적이었다. 유교를 숭상한 조선시대의 왕실(王室)과 양반(兩班) 사대부가(士大夫家)에서 제사(祭祀)라고 하는 의례(儀禮)에 쏟은 노력, 열정의 강도는 그것을 충분히 설명해 주고도 남음이 있다. 그 일례로 우리의 선조들이 초인적(超人的)인 존재와 함께 대화한 내용을 살펴 본다. 태종(太宗) 7년 6월 한여름에 거듭되는 한해(旱害)로 인해 왕은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면서 다음과 같은 제문을 지어 바쳤다.


하느님의 보고 듣는 것은 항상 사람으로부터 하고, 사람의 길흉(吉兇)도 또한 하늘에 나타나니, 하늘과 사람 사이에 감응(感應)하는 것이 심히 빨라서 속일 수 없습니다. 무릇 가물고 물이 넘치는 재앙 같은 것은 항상 임금과 재상의 반도 패덕(反道敗德)과 난상 실정(亂常失政)에 말미암나니, 제 한몸의 죄(罪)로써 부른 것입니다. 그러나 무죄(無罪)한 어리석은 백성과 수많은 생령(生靈)이 먼저 그 해(害)를 입어 굶주리고 병들어 구제할 수 없게 됩니다. 내가 덕(德)이 없는 몸으로 천지의 보우(保佑)를 받고 조종(祖宗)께서 쌓으신 덕에 힘입어서, 한 나라에 군림(君臨)한 지가 이제 여러 해가 되었는데, 한재(旱災)와 수재(水災)가 해마다 없는 때가 없으니, 이것은 모두 어질지 못한 제가 덕의(德義)를 그르쳐서 부른 것이니 천견(天譴)을 당함이 마땅합니다. 어찌 감히 스스로 책(責)하여 상천(上天)에 허물을 사죄(謝罪)하지 않겠습니까?1)


  조선 성리학의 기초를 쌓은 권근(權近)2)에 의해 쓰여진 이 제문(祭文)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느님[天]이라고 하는 경외하는 대상이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 제문의 바탕에 깔린 논리는 하늘과 인간이 선악 길흉(善惡吉凶)의 문제에 있어서 서로 밀접하게 감응(感應)한다고 하는, 한대(漢代) 유학 이래의 천인상감설(天人相感說)이다. 인간의 행위에 신속하게 반응하는 하늘은 추상적으로 상정된 것이 아니라 위정자(爲政者)가 두려워해야 할 실재하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 태종(太宗)이 자기에게 죄가 있어서, 그로 인해 하늘의 노여움을 샀고 그 결과로 즉위한 이후 한해(寒害)가 수해(水害)가 거듭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상투적인 제례문의 한 구절로만 언급된 것이 아니다.  인용한 글에 바로 이어서 태종은 자신이 저지른 죄상을 고백하고 하늘의 용서를 구하는데, 그의 죄상이란 첫째,  1차 왕자의 난 때에 세자였던 자신의 이복 동생을 살해하여 아버지 태조(太祖)의 마음을 다치게 한 것, 둘째, 2차 왕자의 난으로 친형 회안대군(懷安大君)과 대결하고 그를 처벌한 것, 셋째, 정종(定宗)으로부터 왕위를 빼앗다시피 물려받은 것, 넷째, 자신과 생사(生死)를 같이 했던 장인과 처남을 처벌한 것 등이었다. 

  태종이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잔인하게 동기(同氣)를 해치고 부친과도 결별한 것은 우리가 역사적 사실로서 익히 알고 있는 바이지만, 태종이 왕위에 있던 당대에 그것이 패륜적(悖倫的)인 일임을 언급하는 것은 결코 쉽게 허가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왕 스스로가 그 일에 대해 진실한 참회의 정을 갖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한 신하된 자 누구도 감히 그것을 왕의 허물로 지적할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비록 태종의 입장에서 변명하는 수사가 동원되기는 하였지만, 이 사실이 그만큼 적나라하게 언급된 것은 왕 자신이 절박한 심정으로 하늘 앞에 사죄였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한해나 수재 또는 점염병과 같은 재해가 닥쳤을 때, 초인적인 힘에 의지하여 그 위난에서 벗어나기를 갈구한 것은 어느 한 시대에만 있었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점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지극히 이지적이고 합리적인 철학인 ‘성리학(性理學)’을 국가 지도 이념으로 삼은 조선 사회에서 초인적인 신령한 존재에 대한 경외와 신앙이 유교의 학문 이론과 결합하여 국가적인 제도로서 정착되었으며, 그럼으로써 범국가적인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살펴 본 태종 7년의 기우제는 얼핏 우리나라에서 상고시대(上古時代)부터 이어져 온 민간 신앙적 제천의식(祭天儀式)의 일환으로만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그 제문을 쓴 사람이 당대 최고의 유학자 권근이었다는 사실과 그 글 첫머리의 천인합일설(天人合一說)에서부터 중간에 태종의 패륜적인 행위를 반성하는 내용 그리고 말미의 하늘이 만물(萬物)을 조화롭게 생육(生育)하는 의지에 호소하는 기원 등은 유교적인 자연관과 인생관에 일관되게 입각한 것임을 보이는 것이다.

  권근은 『입학도설(入學圖說)』과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을 지어 성리학의 보급에 기여하였으며, 정도전(鄭道傳)3)의 『불씨잡변(佛氏雜辨)』, 『심기리편(心氣理篇)』 등을 주석하여 유교가 불교를 대신하여 조선의 지도 이념이 되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한 사람이다. 그는 태종이 즉위한 직후 왕이 기거하는 궁실(宮室)이 화재를 입게 되자 이를 하늘의 경고로 받아들이는 왕의 교지(敎旨)에 의거하여 앞으로 왕이 근신하고 지켜야 할 도리를 상주하였다.4) 이 때 그가 태종에게 권면(勸勉)한 내용 가운데  1. 효도(孝道)를 독실히 할 것, 2. 정사(政事)를 부지런히 들을 것, 3. 조정에서 사대부(士大夫)를 자주 접견하여 그들의 의견을 들을 것, 4. 경연(經筵)에 부지런히 첨석할 것. 5. 절의(節義) 있는 사람을 포상할 것 등의 다섯 가지는 유교의 합리적인 근본 이념에 충실한 항목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에 더하여 권근이 제시한 여섯 번 째 항목은 ‘여제(厲祭)를 행하라’는 것이었다.

  여제(厲祭)라고 하는 것은 여귀(厲鬼), 즉 백성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귀신들에 대한 제사이다. 여귀는 어떻게 해서 생기는가? 죽은 이의 귀신이 제사를 받지 못하여 굶주리고 원한에 쌓이게 되면 여귀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 여귀에서 비롯되는 원기(怨氣)에 의해서 자연의 화기(和氣)가 상해를 입고 그로 인해 갖가지 질병이 발생하고 변괴가 일어난다. 권근은 이러한 이유에서 ‘제사 받지 못하는 모든 귀신’에 대해서 국가 차원에서 제사를 지내 줄 것을 제안한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권근의 기우제문(祈雨祭文)은 천신(天神)에 대한 제사에 관계된 것인 데 반해, 여귀를 제사하라는 이 상소문은 인귀(人鬼)에 대한 제사를 말하는 것이다. 천신과 인귀, 즉 자연의 귀신과 죽은 사람의 귀신은 유교에서 인정되는 초인적 실체들이다. 이러한 초인적 존재가 실재함을 믿고, 그것에게 지극한 정성의 제사(祭祀)를 올린 것은 비단 조선 초기에 한정된 일이 아니며, 왕실․조정에 국한된 사업이 아니었다.


2. 조선시대의 종교적 제례(祭禮)


- 조정(朝廷)에서 행한 제례


  ‘제사 받지 못하는 귀신’이 있을까 염려하여 그것들에 대한 특별한 제사를 시행할 정도면, 당연히 제사지내야 할 귀신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였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과연 조선시대에는 어떠한 귀신들을 어떠한 형태로 섬겼던 것일까? 먼저 조정에서 국가사업으로 행한 제사의 종류를 살펴보기로 한다.

  조정에서 지내는 제사는 크게 3 종류로 나눌 수 있다. 그 규모에 따라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로 나누는 것이다. 이 중 대사에 속하는 것은 사직(社稷)에 대한 제사, 종묘(宗廟)에서의 제사, 영녕전(永寧殿)에서의 제사이다.

  사직(社稷)은 땅이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을 말하는 것으로, 이들에 대한 제사는 일년에 세 번 사직단에서 거행되었다.5) 제사의 대상인 귀신을 천신(天神), 지시(地示), 인귀(人鬼)로 나누는 사고에 따르면, 땅의 신인 사직에 대한 제사에 앞서 천신에게 올리는 제사가 있어야 하겠으나, 천신에 대한 제사는 천자의 일이며, 조선은 제후국이기 때문에 직접 천신에게 제사할 수 없다는 논의가 일어 조선 초기 이후 천신에 대한 제사, 교제는 우리나라에서 행해지지 않았다.6)

  종묘(宗廟)와 영녕전(永寧殿)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그것에 제사하는 곳이다. 종묘에는 태조, 태종, 세종 등 나라의 터전을 세운 왕과 재위중인 왕의 4대조까지를 모셨으며, 영녕전에는 역대 왕과 비 중 4대가 지나 종묘에서부터 신주를 옮겨 이들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7)

  대사(大祀)보다 한 단계 작은 규모의 제사, 즉 중사(中祀)에 속하는 것은 바람, 구름, 우뢰, 비, 산, 바다, 강 등의 귀신[風雲雷雨, 嶽, 海, 瀆]에게 지내는 제사, 제일 먼저 농사짓기 시작한 사람의 귀신[先農]에게 지내는 제사, 제일 먼저 누에치기한 사람의 귀신[先蠶]에게 지내는 제사, 비를 관장한 귀신[雩]에게 지내는 제사, 공자(孔子)에게 올리는 제사, 단군(檀君), 기자(箕子), 동명왕(東明王), 박혁거세(朴赫居世), 온조(溫祚), 왕건(王建) 등 역대 왕조의 시조에게 올리는 제사 등이었다.8)

  작은 규모의 제사인 소사(小祀)는 주로 군사적인 일에 관계된 것이었다. 말을 관장하는 별의 천마사성(天馬四星)인 마조(馬祖)에게 지내는 제사, 말을 처음 기르기 시작한 사람의 귀신인 선목(先牧)에게 지내는 제사, 처음 말을 타기 시작한 사람의 귀신인 마사(馬社)에게 지내는 제사, 말에게 재해를 입히는 귀신인 마보(馬步)에게 지내는 제사가 있었고, 그밖에 별에 대한 제사로서 영성(靈星)에 대한 제사, 노인성(老人星)에 대한 제사, 이름난 산과 큰 강에 지내는 제사, 추위를 맡은 귀신[司寒]에게 지내는 제사, 행군을 맡은 귀신[禡]에게 지내는 제사, 군기[纛]에 지내는 제사, 원한을 품어 해악을 끼치는 귀신(厲鬼)에게 지내는 제사가 있었다.9)

  이상의 제사는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법제(法制)로서 기록되어 조선시대 말기까지 중단 없이 시행되었던 국가적인 제사이다. 수백 명의 인원이 동원되고 3개월 전부터 준비되는 종묘․사직의 대사만 하더라도 일년에 10 차례나 행해졌고, 서울과 전국의 명산대천(名山大川)에서 왕의 이름으로 행해진 공식적인 제사를 모두 헤아리면 100여 회를 훨씬 상회한다. 정기적인 제사 이외에도 한해가 들거나 돌림병이 돌거나 할 때 왕의 명령으로 특별히 지내는 제사까지 합하면 제사는 곧 조정의 일과였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조선이라고 하는 사회와 종교성이라고 하는 문제를 별개로 생각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서도 드러나는 것이다.


- 사대부가(士大夫家)의 제례


  국가에서 행한 제사의 종류가 이렇게 다양하고 많았다고 하는 사실은 일반 국민들에 대한 그 영향력도 컸음을 짐작케 한다. 국민들은 어떠한 제사에 참여하였을까?

 『예기(禮記)』 「곡례(曲禮)」 편에 의하면 천자(天子)는 천지(天地)와 사방(四方)과 산천(山川)과 오사(五祀)에 제사를 드릴 수 있으나 제후(諸侯)는 사방과 산천과 오사에 제사를 하며, 대부(大夫)는 오사에만 제사하고, 사(士)는 조상에만 제사할 수 있다고 하였다. 고대 중국에서는 대부(大夫)와 사(士)가 신분을 달리하는 두 계층이었기 때문에 제사 드리는 대상에도 차별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사(士)라고 하는 것은 벼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자, 대부는 벼슬에 나아간 자의 의미로 구별되었을 뿐 양자 사이에 신분적인 간격이 있지 않았으며, 그들을 통칭하여 사대부(士大夫)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우리에게는 ‘양반(兩班)’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조선시대의 사족들에게 공식적으로 허용된 제사는 선대(先代)와 오사(五祀)에 대한 제사이다. 오사라고 하는 것은 천지, 사방, 산천의 귀신보다 작은 군소 귀신을 말하는데, 대문, 부엌 등 자기 집안의 어느 구석에 자리한다고 여겨지는 작은 귀신들은 선대에게 올리는 제사 때에 함께 제사하였다.

  사족(士族)들이 제사를 드려야 하는 선대의 대수에 대해서도 고대 중국의 경전에는 명시적인 규정이 있었다.  『예기』  「왕제」 편에 의하면 “천자는 7 묘(廟), 제후는 5 묘, 대부는 3 묘, 사는 1 묘를 세워서 제사하며, 서인은 묘 없이 침(寢)에서 제사 드린다”고 하였다.  관직의 품계에 따라서 제사 대수를 정하는 사고는 우리나라에도 이어져, 『경국대전』에서는  “6품 이상의 문관(文官)과 무관(武官)은 3대까지 제사지내고, 7품 이하는 2대까지 제사지내며, 일반 사람은 단지 부모에게만 제사지낸다”10)고 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제사 지내는 대수를 관직의 품계에 따라 차별하는 것은 조선시대의 현실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관품(官品)이 세습적 지위여서 평생동안 바뀌지 않으며 대대로 물리는 것이었지만, 조선시대의 사족은 관직에 오른 후 연공(年功)이나 공업(功業)에 따라 품계가 오르고 내리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현실적 이유와 조상에 대한 보본(報本)의 의리를 강조하는 성리학의 정신에 따라 조선시대의 사대부가에서 실제로 행해진 제사의 형태는 품계의 구별 없이 4대까지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는 사계절마다 고조부모(高祖父母) 이하의 조상에게 함께 올리는 사시제(四時祭)11), 종손(宗孫)이 선조에게 올리는 선조 제사,12) 선조 중에서도 은의가 가장 두터운 아버지에게 올리는 예제(禰祭)13), 조상이 돌아가신 날을 추념하는 기제(忌祭), 조상의 묘(墓)를 돌보고 지내는 묘제(墓祭),14) 그리고 명절에 지내는 약식 제례인 차례(茶禮)가 있었다.

  사대부들이 제사라는 의례를 통해 숭모(崇慕)한 대상 중에는  그들의 선대 이외에도 후세에 큰 가르침을 남긴 선배 학자들이 있었다. 인류의 스승으로 추앙받는 공자에 대한 제사는 석전(釋奠)이라고 하는 이름의 국가적 의례로 정해져 봄 가을에 한 번씩 대규모의 제사를 행하였다. 석전을 행하는 문묘(文廟)에는 공자 외에도 안자(晏子), 증자(曾子), 맹자(孟子), 주자(朱子) 등의 중국의 유학자와 이황(李滉), 이이(李珥) 등의 우리나라의 대학자들을 함께 모셨다. 유교는 종교이면서 동시에 학문이었기 때문에 조선사회를 이끌어간 그 시대의 지식인, 즉 사대부들은 자기들의 학문적 선배에 대한 종교적 의례를 통해 학문의 목표를 고양시키고 학인들 상호간의 유대 의식을 강화하였다. 그들이 학문적인 교류를 한 곳은 전국 각지에 있는 향교(鄕校)와 서원(書院)이었는데, 그 모든 곳에 예외없이 포함되어 있는 시설이 바로 선배 학자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대성전(大聖殿)이었다. 또 별도의 교육 시설 없이 단지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설립된 사우(祠宇)의 수 또한 적지 않아, 전국에 산재한 서원과 사우의 수는 600개 소를 넘기도 하였다.15) 그 모든 곳에서 봄․가을로 시제를 올리고 초하루와 보름마다 약식의 제사를 드렸으니 조선 사회는 끊임없는 제사의 연속으로 500년의 역사를 이어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3. 자연의 신[天神]에 대한 의례


- 유교의 귀신관(鬼神觀)


  인류 사회에 존재하는 여러 종교의 보편적인 현상은 의례(cult, rite)를 행한다고 하는 것이다.16)  조선시대에 왕실에서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제사’라고 하는 의례가 그토록 중요시되고 그만큼 광범위하게 시행된 사실은 종교적인 사고가 그 사회 전체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보이는 것이다.  500년이 넘는 역사를 제사라는 의례로 엮다시피 한 조선시대 종교적 사고의 내용은 과연 어떠한 것이었을까?  넓은 범위에서는 그 시대의 지도 이념이었던 유학의 모든 가르침이 그러한 사고 방식에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효(孝)를 강조하는 윤리의식에서부터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도 그 생전의 은의(恩義)를 추모하는 행사를 중요시하는 사고가 강화된 점, 통치자는 백성의 생업을 보호하는 의무를 진다는 안민(安民)․보민(保民) 의식에서부터 자연 재해가 있을 때마다 군주가 자신의 정치적․윤리적 과실을 반성하는 풍토가 조성되었다고 하는 점 등은 유교의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가르침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같은 합리적, 현실적 요소만 가지고 제사의 모든 의의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제사는 분명히 현상에서 감각되지 않는 초현실적 존재, 즉 귀신(鬼神)이라고 하는 것을 대상으로는 하는 의례이다. 그 초현실적 존재에 대한 관념을 분명하게 갖지 않고서는 몸과 마음의 정성을 다하는 제사의 예(禮)를 행하기 어려운 것이다. 조선시대의 사대부 학자들에 의해 집중적으로 연구되었던 성리학이 귀신이라고 하는 초현실적 존재에 대해, 그리고 그 존재와 관계를 맺는 제사라고 하는 의례에 대해 적지 않은 교설(敎說)을 남긴 것은 유교의 포함하는 종교적인 측면을 설명하고자 한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귀신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해 공자가 분명한 답을 주지 않았던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허황한 것을 좇기보다는 현실의 문제에 충실하게 하려는 것이었다.17) 반면, 성리학자들이 이것을 그들의 학문의 주제 가운데 하나로 삼은 이유는 귀신이라고 하는 것이 설명되지 않는 상태로 남아 미신적(迷信的)인 기대나 두려움을 낳기보다는 합리적으로 설명됨으로써 그에 대한 의식이 인간들의 삶 속에 바람직한 방향으로 정착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천지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 계절에 따라 다양하게 모습을 바꾸는 자연의 변화상, 그리고 주변의 사물 사건에 접할 때마다 미묘하게 변화하는 인간의 심리 상태에 대해서까지도 모두 그 원인과 변화 과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한 성리학의 이론 세계에서는 귀신이라고 하는 존재도 불가사의한(不可思議) 초월적 존재라기보다는, 어떤 원인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있게 된 것으로 설명된다. 귀신은 그것이 신묘(神妙)한 힘을 발휘하는 초자연적 실체가 아니라, 자연 속의 여러 사물과 현상이 생겨나고 소멸하는 그 중간 과정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연 속의 존재하는 모든 것을 고정적인 실체로 보지 않고 끝없는 변화 속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되, 그 변화의 근저에는 신뢰할 수 있는 진실한 변화의 원리가 깃들여 있으며 그것이 자연을 본받는 인사(人事)의 원리가 된다고 하는 것은 유학 사상의 기본적 사고인데, 귀신 개념도 명백히 그러한 자연관 안에서 정립된 것이다. 귀신은 끝없이 변화하는 자연 현상 속에서, 자연이 그 스스로 변화해 가는 주체적인 능력을 보는 측면에서 파악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귀신이라고 하는 존재를 인지로서 이해할 수 없는 괴력(怪力)으로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자연 운행의 모습으로 이해하였다는 점에서 성리학의 귀신관(鬼神觀)은 지극히 이지적이고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완전히 물리적 또는 기계적인 현상으로 보지 않고, 거기에는 자기 스스로를 자율적으로 이끌어 가는 주재력(主宰力)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귀신이라고 하는 존재가 존중과 외경의 대상으로 삼으로 수 있는 여지, 합리성과 종교성이 결합할 수 있는 계기가 열리는 것이다. 


- 천신(天神)에 대한 제사(祭祀)가 담고 있는 의미


  조선시대 500여 년 동안 국가에 재해(災害)나 위난(危難)이 닥칠 때마다 중앙의 조신(朝臣)들과 재야(在野)의 선비들은 산천의 신, 또는 제 명(命)에 죽지 못한 사람들의 귀신에 대해서 제사를 올리는 일을 강력하게 청원하여 시행토록 하였다. 그러한 제사에 소요된 비용은 국가 재정의 절반도 넘는 규모였다고 한다. 한지만 또 한편으로 유학을 존숭하는 지식인들은 민간에서 행해지는 대규모의 산천제(山川祭)를 부당한 제사, 즉 ‘음사(淫祀)’로 규정하고 이를 적극 억제하고자 하였다. 명망있는 학자․관료의 일화 속에는 그들이 지방에서 영험하다고 소문난 신사를 강제로 철폐함으로써 미신으로 인한 민생의 폐해를 제거하였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이러한 두 가지 태도는 얼핏 보아 서로 상반된 이중적 자세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한 유학자들의 의식은, 초현실적인 존재를 대하는 의례의 의의를 인정하되, 그것이 어디까지나 유교의 합리성의 범위 내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18) 유학자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산신(山神)이나 수신(水神), 여귀(厲鬼)에 대해 제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은 이 나라 산천과 백성의 주인인 임금 한 사람 뿐이다. 따라서 자연의 신에 대한 제사는 임금이 직접 주관하거나, 적어도 그의 합법적 위임을 받아 행해져야지, 백성들이 임의로 행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이다.

  유학자들이 음사에 대해 반대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이 허황한 구복(求福) 행위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산천의 신이나 여귀에게 제사하여 복을 얻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에 대해 유학자들은 단연코 ‘아니다’라고 답한다. 복을 얻을 이치가 없는데도 복을 비는 것, 그것은 어리석은 행위일 뿐이며, 백성들이 그것을 모르고 어리석은 짓을 할 때에는 제지하고 깨우쳐야 한다는 것이 유학자들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그렇다면 이와 관련하여 생기는 의문은 그들이 한해나 수재, 전염병 등을 만났을 때 지성으로 온갖 귀신에게 제사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이 물음에 대한 유학자들의 답변은 “제사지내는 이의 지극한 정성이 화를 물리치고 복을 부르는 것이지, 귀신이 화복(禍福)을 마음대로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상 재해를 만났을 때 조정해서 행한 갖가지 제사의 제문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한결같이 군주가 자신의 정치적, 윤리적 과오를 반성하고 스스로 그 잘못에 대해 책임질 각오가 되어 있으니, 그 화를 백성들에게 전가하지 말아달라는 뜻이 애절한 문사로 표현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이것은, 왕과 위정자들의 마음이 그 제문의 문구가 표현하는 대로 진실한 정성으로 순화되어 있을 때 하늘의 감동을 끌어낼 수 있고 천지의 기운을 바로 할 수 있어서 자연의 운행을 정상적인 것으로 되돌릴 수가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한 것이다. 조선초기의 성리학자 남효온(南孝溫)19)은 이 점에 대해 “비유하자면 마치 농부가 농사를 지을 때 적게 심으면 적게 수확하고, 많이 심으면 많이 수확하는 것과 같다. 사람이 스스로 화와 복을 취하는 것이지, 귀신이 사람에게 화와 복이 미치게 하는 것은 아니다.”20)라고 설명하였다. 제사는 귀신에게 복을 구하는 거래가 아니요, 나의 마음가짐과 삶의 자세가 하늘의 도리에 부합하기를 다짐하는 자기 정화(淨化)의 의식이다. 그 제사로 인해 나에게 돌아오는 복이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삶이 하늘에 도(道)에 합치함으로써 얻어진 응보(應報), 즉 『중용(中庸)』에서 말하는 참천지화육(參天地化育)의 결과이지, 귀신의 영험한 능력에서 얻어지는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산천의 신들에게 간구(懇求)하되 그가 직접 어떠한 신묘한 능력을 발휘해 줄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간곡한 정성이 천지자연의 이치와 하나가 되어 간구하는 일이 올바른 데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것.  유교를 신봉한 조선시대의 선조들이 자연에 대한 제사에 부여했던 의미는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고 보여진다.


4. 조상의 신[人鬼]에 대한 의례


- 유교의 사생관(死生觀)과 제사의 의의


  돌아가신 이를 의례로서 추모하는 것 역시 어느 사회, 어느 종교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다른 종교의 경우 그러한 의례가 포함하는 의미는 이승에 남은 이들이 돌아가신 이를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지 않고 추모한다거나, 죽은 이의 영혼이 저승에서 평안하기를 희구하는 정도에 그치는 반면, 유교의 경우 제사의 대상이 되는 죽은 이의 귀신은 단순한 추모의 대상이 아니라 후손들이 정신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종교적 신앙의 대상이기도 했다.

  유교에서 행하는 조상에 대한 제사는 무엇을 어떻게 받드는 것인가? 기독교에서는 육신(肉身)과 구별되는 영혼(靈魂)이라고 하는 것의 존재를 인정하기 때문에 죽은 이에 대한 추모는 그 영혼을 위한 기도가 된다. 불교에서는 이승에서의 모든 행위와 사고가 업(業)이라고 하는 형이상학적 존재로 집적되어 그것이 내세에서의 삶을 만들어 낸다고 믿기 때문에 그 윤회전생(輪廻轉生)하는 존재가 추모의 대상이 된다. 그러면 유교에서 후손의 제사를 받는 것은 무엇인가? 죽은 이의 귀신이다. 그렇다면 유교에서도 육신과는 별도로 있는 영적인 것의 존재를 인정하는가? 그 물음에 대한 일차적인 답변은 ‘아니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 유교의 이론 배경을 이루었던 성리학에서는 인간의 몸이 기(氣)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기라고 하는 것은 천지 사이에 가득차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모든 자연 사물의 원질(原質)이 되는 것인데,  인간의 몸도 그러한 기가 모여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한 인간의 탄생은 어머니의 태 속에서 아버지 어머니의 기, 그리고 그 시점에 주위를 떠돌던 기가 합쳐져서 하나의 독립된 생명체를 형성함으로 이루어진다. 인간의 죽음은 그 과정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이다.  독립된 개체로 존재하던 한 인간의 생명이 다하게 되면 그 몸을 이루고 있던 기가 자연 속으로 흩어져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이 기가 흩어짐은 사람이 죽는 순간 곧바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긴 시간을 두고 서서히 진행되는 것이다.21)

   제사의 대상이 되는 죽은 사람의 귀신, 즉 인귀(人鬼)라고 하는 것은 소멸의 과정에 있는 기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이황(李滉)22)은 이 점을 불 꺼진 화로 속에 더운 기운이 한 동안 남아 있다가 시간이 더 지나야 차갑게 식는 것, 그리고 여름날에 해가 넘어간 뒤에도 더위가 남아 야음(夜陰)이 짙어진 뒤에야 서늘해지는 것에 비유하였다. 사람의 기도 그가 죽은 후 완전히 사라지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야 하기 때문에 그 사이에 귀신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23) 이황은 그러한 이유에서 옛 사람이 ‘죽은 자를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듯이 하라’고 하였으니, 제사의 의의는 바로 그런 데 있다고 생각하였다.24)

  돌아가신 이에 대한 제사가 단순한 추모의 행사에 그치지 않고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서 실제로 교감을 갖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 역시 인간의 육신과 정신이 기로 이루어졌다는 이론에 의해 설명되었다. 기(氣)가 모여서 사람이 되고, 흩어져서 귀신이 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똑같이 적용되는 원리이지만, 한 핏줄의 조상과 자손의 사이에는 특별히 그 기에 서로 통하는 것이 있어서 제사 때 서로를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이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자신이 진정으로 정성을 모아 돌아가신 이를 보기를 염원하면 그것이 흩어진 조상의 기에 영향을 미쳐 없어졌던 형상과 소리, 마음을 다시 존재케 해서 제사를 흠향(歆饗)할 수 있게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이루어지는 귀신의 강림(降臨)은 다시 동질의 기로 이루어진 자손의 마음을 움직여 느낌을 갖게 할 수 있으니, 이로써 조상과 자손에 제사를 통해 서로 감통(感通)할 수 있다는 것이다.25)


- 유교적 제례에서의 영원성(永遠性)의 추구


  제사의 대상이 되는 죽은 이의 혼백(魂魄), 즉 인귀(人鬼)는 한시적으로만 존재하는 유한한 존재인가, 아니면 거기에 어떤 불멸의 영원성 같은 것이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한 유교, 특히 성리학자들의 답변은 그것이 한시적으로만 있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그 기는 흩어지기 시작하는데, 그 흩어지는 과정에 있는 것이 귀신이니, 귀신의 존재는 유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귀신을 이렇듯 한시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것은 선대에 대한 제사를 4대로 그치게 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 되기도 한다. 그 이상의 조상은 관계가 소원하여 애틋한 추모의 정이 없을 뿐 아니라, 혼백을 지탱하는 기가 완전히 소멸되어 더 이상 제사를 흠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리학의 사생관(死生觀)을 여기까지만 살펴본다면 그것은 지극히 유물론적(唯物論的)이어서 영원성(永遠性)을 추구하는 종교적 면모를 찾기 어려운 듯이 보이기도 한다. 우리의 선조들은 영원한 존재와 관계 맺고자 하는 열망, 또는 스스로 불멸(不滅)의 존재로 남고자 하는 소망을 그처럼 쉽게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일까?

  유교의 사생관이 영원성에 대한 바램을 포기한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드러내 준 사람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서경덕(徐敬德)26)이었다. 그는 세상의 모든 만물이 기의 작용에 의해 생성되고 소멸된다는 전제를 세운 뒤에, 그 삶과 죽음 사이에는 형상를 이루는 기의 모이고 흩어짐[聚散]의 차이가 있을 뿐, 그 기의 순수한 본질은 있고 없음[有無]의 구분을 넘어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서경덕은 이렇게 말하였다.


몸과 넋이 흩어지는 것을 보면 얼핏 완전히 없어져 무로 돌아가 버리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것은 깊이 생각하지 않아서 그렇게 여기는 것이다. ..... 기(氣)가 맑고 한결같고 깨끗하고 텅비어 있는 것[湛一淸虛]은 태허(太虛)가 움직여 양(陽)을 낳고 머물러 음(陰)을 낳는 시초에 근원을 두고 있다. 그것이 점점 모여서 지극히 넓고 두터운 데 이른 것이 천지(天地)요 인간(人間)이다. 사람이 흩어질 때는 형백(形魄)이 흩어질 따름이지 담일청허(湛一淸虛)한 것이 모인 것은 끝내 흩어지지 아니한다. 태허(太虛)의 맑고 한결같은 데로 흩어져 보았자 똑같은 기(氣)인 것이다.27)


  그는 기 중에서도 흩어지는 것과 흩어지지 않는 것을 구분하여 전자는 형백(形魄)이라고 하였고 후자는 담일청허(湛一淸虛)라고 하였다. 기에 취산(聚散)이 있는 것은 형백이 모였다 흩어졌다 하기 때문이요, 기에 유무(有無)가 없는 것은 담일청허가 영원히 한결같기 때문이다. 서경덕은 인간의 정신이나 지각은 바로 이 담일청허한 기의 본질에 관계하는 것으로 보았다. 물론 사람의 정신이나 지각은 물질적인 형기(形氣)에 의착하고 있으니 그 형기가 흩어지면 그것의 현상적인 모습은 사라질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기에 간직된 담일청허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기 때문에 그러한 측면을 바라보면 인간의 지각이나 정신도 영원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경덕이 생각한 사후의 인간 존재, 즉 귀신은 그 형체는 계속 흩어져 가도 그 기의 담일청허는 영원히 남아 존재하는 것이다. 형체를 이루는 기에는 취산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삶과 죽음, 인간과 귀신이 둘[二]이지만, 그 모이고 흩어짐을 상관없이 그 기의 담일청허는 한결같으므로 삶과 죽음, 인간과 귀신은 하나[一]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일기장존설(一氣長存說)이라고 일컬어지는 서경덕의 이 이론은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끌어간 이기이원론자(理氣二元論者)들에 의해서 혹독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원론자(二元論者)들이 서경덕이 주장에 대해 반대한 것은 기를 가지고 존재의 항존성(恒存性)을 설명하려 했다는 점이지, 서경덕이 희구한 존재의 영원성 자체가 비판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에 대한 대표적인 비평가 이황(李滉)도 서경덕의 이론에 대해서 이(理)를 기(氣)로 오인했다고 했을 뿐,28) 인간이 삶과 죽음의 구분을 넘어서 어떤 영원한 존재와 합일할 수 있다는 관념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서경덕이 기의 담일청허로 지목했던 순수하고 영원한 본질은 이(理)라는 이름으로 실체화 되어 그 순수성과 영원성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냈던 것이다.29)

  인간이 죽은 후 오랜 세월이 흘러 그 혼백의 기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불멸의 이(理)가 그 존재의 영원성을 담보한다는 생각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의 한 사람인 율곡 이이(李珥)30)의 다음과 같은 글에서 살필 수 있다.


대(代)가 오래된 조상은 그 기(氣)는 비록 사라졌지만 그 이(理)는 없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또한 정성으로써 감통(感通)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제 저 맑고 푸른 하늘에 본래 비가 올 기운이 없다가도 갑자기 구름이 모여들어 마침내 큰 비를 내리는 것은, 비록 비가 내릴 기운[氣]은 없었지만 역시 능히 비가 내릴 수 있는 이치[理]가 있었기 때문이다. 원대(遠代)의 조상은 감응할 수 있는 기가 없지만 지극한 정성으로 염원하면 마침내 감응하게 되는 것은, 비록 능히 감응할 수 있는 기(氣)는 없지만 감응할 수 있는 이(理)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분이 죽은 지가 이미 오래되면 이(理)로써 감응하는 것이다. 혹은 기(氣)가 있고 혹은 기가 없지만 그 감응한다는 점에 있어선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자손의 정신이 바로 조상의 정신이니, 나의 있음을 가지고 그의 없음에 감통하는 것이 또한 무엇이 의심스럽겠는가?31)


  먼 조상은 후손들의 정성과 더불어 서로 감통할 수 있는 기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불멸의 이(理)가 감통(感通)의 이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먼 조상에 대한 제사도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제사와 마찬가지로 사자(死者)와의 감응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이는 이러한 것에 대한 비유로 맑은 하늘에 구름이 모여 비를 내리는 것을 들었다. 운기(雲氣)가 없었어도 비가 내릴 이치가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이의 이러한 설명은 이․기(理氣)의 역할을 구분하여 작위(作爲)의 능력을 기에만 부여하고 이에는 원리적인 성격만을 갖도록 한 성리학의 이기이원론의 전제에 비추어 볼 때 다소 무리한 이론이라고도 보여진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언급에서 의미있게 파악해야 할 점은,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생각한 이(理)라고 하는 실체는 단순히 무정의․무조작(無情意無造作)의 자연적, 윤리적 원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영원성을 담보해 주는 영명(靈明)한 존재로 인식되기도 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면, 유교에서 행하는 돌아가신 이에 대한 제사는 단순히 사라져 가는 혼백(魂魄)을 잠시 모시고 추모하는 행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그와 나를 하나로 묶어 주는 위대한 실체의 감응력(感應力)을 체험하는 신령스러운 의례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유교 제례에 있어서 조상의 혼백은 추모의 대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후손들이 믿고 의지하는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 혼백은 신앙의 궁극적 대상이기보다는 영원하고 순수한 실체를 체험할 수 있게 해 주는 매개자였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멸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혼백은 영원성을 열망하는 종교적 신앙의 대상이 되기에는 너무나 유한하고 불완전하다. 혼백과 감응하는 후손들이 궁극적으로 신앙하는 것은 그 교감을 가능하게 해 주는 보다 근원적이고 영원한 존재였다. 조선시대의 성리학자들이 이(理)라는 이름을 붙여 존숭(尊崇)한 자연과 도덕의 근본 원리 속에는 그 같은 영원(永遠)하고 영명(靈明)한 실체(實體)의 관념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5. 유교의 한계와 의의


- 초월적 자유의 제약


  일반적으로 종교의 기능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는 것은 ‘현실의 속박에서 탈출할 수 있는 출구(出口)를 열어 주는 것’이다. 특히 가난과 압제에서 고통받으며 살아간 하층민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정신적으로나마 안심입명(安心立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조선시대의 유교는 그와 같은 정신적 출구의 역할을 담당하지는 못했다. 초현실적인 존재를 인정하고 그 존재와의 관계를 경건히 함으로써 자신을 정화(淨化)하는 행위는 지극히 윤리적이면서도 종교적인 것이라고 할 있다. 하지만 유교의 경우, 그러한 종교적 기능이 신분제를 기반으로 한 사회 제도와 단단히 묶여서 행해졌다는 데에 보편 종교로서의 한계가 노정(露呈)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사회를 이끌어간 지도계층에게는 그 신분 예속성 때문에 유교의 가르침이 더 절실한 가치관으로 받아들여졌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유교는 사회의 주역이 아닌 하층민이나 여성들이 관념적으로나마 현실의 속박에서 벗어나 초월적인 세계에서의 해방감을 얻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산천야제(山川野祭)와 무격(巫覡)의 푸닥거리를 국법으로 금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민들 사이에서, 심지어는 사대부가의 여성들 사이에서 조선말기까지도 성행한 이유, 강력한 억불시책(抑佛施策)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서 불교에 대한 신앙이 수그러들지 않았던 이유도 유교의 종교성이 현실적인 제도 윤리에 단단히 묶여서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았다는 데 있다.32)


- 현실과 영원의 조화


  유교가 현실 사회의 체제와 질서를 위주로 하는 사고와 밀접하게 결합한 종교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점에 관해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될 것은, 유교에서 초월적인 존재와 관계 맺고자 하는 인간의 종교적 염원 그 자체가 억제되거나 무시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유교의 최대의 장점은 그것이 현실세계의 질서와 조화를 중시하는 사고에 매인 종교였다고 하는 바로 그 점에서 찾아진다.

  종교라고 하는 것은 그 단어 자체가 표현하듯이 모든 것 우위에 서 있는 가치관이다. 만일 그 종교의 가르침이 세속적인 가치관과 상충하거나 거리를 두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종교에 빠져들면 들수록 현실에의 적응력을 상실하게 되고, 궁극에는 현실 속에서의 건전한 삶을 포기하거나 스스로 파괴해 버리는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 반대로, 현실 속의 삶에 더 큰 의의를 두는 사람에게는 그의 세속적 삶과 상충되는 종교적 가르침들이 지극히 비현실적이고 허망한 얘기로만 치부되어 그 모든 가르침에 귀기울일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어느 쪽이든 종교적 세계와 현실 세계 사이에 넘나들 수 없는 벽이 존재하게 되고, 종교적 가치와 세속적 가치가 끝임없이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관계로 갈등을 겪게 된다.

  조선이라고 하는 나라를 건립하고 500여 년간 그 나라의 종묘 사직을 이끌어 온 우리의 선조들은 영원성에 합일하고자 하는 인간의 종교적 열망과 현실사회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는 세속적인 염원이 하나로 합치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하였으며, 그 노력의 결실로서 종교이면서 동시에 정치철학이고 교육이념인 성리학(性理學)을 그 사회 최고의 가치 기준으로 정립하였다. 그러한 사고방식 안에서는 종교적 염원과 세속적 목표가 서로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상보적 관계에서 서로를 완성시키는 상승 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조선 사회가 군주(君主)․사대부(士大夫)에서부터 상민(常民)․노복(奴僕)에 이르기까지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견고한 사회 윤리로 묶어 500여 년간 안정된 기강(紀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점에서 찾아진다고 할 수 있다.


  현실과 영원의 문제를 하나로 묶어서 일관된 종교관을 세웠던 조선의 유교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더 이상 과거와 같은 힘을 발휘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조선 유교가 현실 문제와 종교성을 너무나 긴밀하게 묶어 두었기 때문에 현실 세계가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자 그것과 한 몸이었던 종교적 세계관도 순식간에 허물어진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종교였다면 현실의 변화가 아무리 급격하게 왔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까지는 그 초월적인 세계에 대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을 터이지만, 유교에 있어서는 그러한 융통성이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21세기의 기술정보 사회에 도달한 우리나라에서 유교를 다시금 독립된 종교로서 재흥하려는 노력은 무의미할 것이다. 유교가 현실에 매인 종교였다고 하는 사실은 바꿔 말해 ‘과거(過去)’에 매인 종교라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말이 곧 오늘날 우리가 유교라고 하는 우리의 전통 종교를 전혀 돌아볼 필요가 없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 사회의 한국인이 얼마나 새로운 종교에 몰입하든, 아니면 외형적으로 종교라고 하는 것에서 얼마나 유리되어 있든 간에, 내가 몸담고 있는 현실을 포기하지 않고 그 속에서의 삶을 불변의 영원성에 합일시키려는 한국인의 전래적 종교 의식(意識)은 오늘날 우리 개개인의 의식 저변에 면면히 살아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영원과 현실을 긴밀하게 묶어 두고 양자의 조화를 추구한 우리의 전통 종교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 한국 제종교(諸宗敎)가 겪고 있는 현실과 이상의 갈등 문제를 ‘한국인의 종교 의식’이라고 하는 근본적인 입장에서 성찰할 수 있는 시각을 열어 줄 수 있을 것이다.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1) 『太宗實錄』 권13,  7년 6월 28일 庚戌


2)  권근(權近): 1352(공민왕 1)~1409(태종 9).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 초명은 진(晉), 자는 가원(可遠), 호는 양촌(陽村).


3)  정도전(鄭道傳): 1337(충숙왕 복위 6)~1398(태조 7). 고려말 조선초의 정치가․학자.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4)  權近, 「壽昌宮災上書」, 『陽村集』 권31 上書類, 7a-13b


5)  사직(社稷)에 대한 제사는 2월과 8월 첫 번째 무일(戊日)과 동지달의 납일(臘日)에 시행하였다. <『經國大典』 권3 禮典, 祭禮>


6)  고려시대까지는 우리나라에서도 천신(天神)에 대한 제사가 공식 국가 행사로 치뤄졌으나, 조선 태조 때에 중국 사신이 ‘제후국에서는 천신에 대한 제사를 행할 수 없다’고 한 것을 계기로 그 당위성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 결국은 중단되게 되었다. 천신에 대한 제사가 공식적으로 회복된 것은 대한제국이 건립된 이후(高宗 34년, 1897)이며, 그 사이에는 한재(旱災)나 수재(水災) 등의 특별한 경우에만 천신에 대한 제사를 시행하였다. <『世宗實錄』권4, 1년 6월 7일 庚辰 참조>


7)  종묘 제사는 사계절 첫달(1월, 4월, 7월, 10월) 상순과 12월의 납일 등 5 차례에 걸쳐 시행되었으며, 영녕전 제사는 일년에 두 번, 1월과 7월의 상순에 행했다. <『經國大典』 권3 禮典, 祭禮>


8)  풍운뇌우(風雲雷雨)․악(嶽)․해(海)․독(瀆)에 대한 제사는 2월과 8월의  상순, 선농(先農)은 경칩 후 첫 번째 해일(亥日), 선잠(先蠶)은 3월 사일(巳日), 우사(雩祀)는 4월 상순, 공자(孔子)는 2월, 8월의 첫 정일(丁日), 역대 시조는 2월, 8월에 지낸다. <같은 글>


9)  마조(馬祖)는 2월, 선목(先牧)은 5월, 마사(馬社)는 8월, 마보(馬步)는 11월에 제사하였고, 영성(靈星)에게는 입추(立秋) 후 진일(辰日) 노인성(老人星)에게는 추분(秋分), 명산대천(名山大川)에는 2월과 8월, 사한(司寒)에게는 춘분(春分)과 12월에 제사를 지냈다. 또한 마제(禡祭)는 일년에 두 차례 무술 훈련[講武]하기 전날에 지냈으며, 독제(纛祭) 경칩(驚蟄)과 상강(霜降)에, 여제(厲祭)는 청명(淸明), 7월 15일, 10월 초하루에 지냈다. <같은 글>


10) 『經國大典』 권3 禮典, 奉祀


11) 봄․여름․가을․겨울의 중간 달, 즉, 2월․5월․8월․11월에 지낸다. “時祭用仲月.” <『朱子家禮』 권5 祭禮 >


12) 입춘(立春)에 행한다. “立春祭先祖.” <같은 글>


13) 9월에 지낸다. “季秋祭禰.” <같은 글>


14) 3월 상순에 지낸다. <같은 글>


15) 이영춘, 『차례와 제사』, 대원사, 1994. p. 45


16) 금장태, 『유교사상과 종교문화』, 서울대학교출판부, 1994. p. 145


17) 귀신을 섬기는 방법을 물은 제자에게 공자는 “사람을 섬길 수 없으면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였고, 죽음에 대한 물음에 대해서는 “삶을 알지 못하면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고 답하였다. 季路問事鬼神. 子曰: “未能事人, 焉能事鬼?” 曰: “敢問死.” 曰: “未知生, 焉知死?” <『論語』, 「先進」>


18) 하늘과 땅, 산과 물에 신령한 존재가 있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사고는 유교의 독특한 사고가 아니요 어느 지역 어느 시대에서나 보편적으로 존재해 온 생각이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자연을 숭배하는 의례는 유교의 전래 이전 부족국가(部族國家) 시대에서부터 있어 왔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성리학(性理學)이 국가적 지도 이념으로 정착되었다고 해서 그 이전부터 행해져 온 그러한 의례들이 근본적으로 바뀌거나 한 것은 아니다. 왕실에서 행한 온갖 자연물의 신에 대한 제사는 삼국시대, 고려시대부터 행해져 온 것을 계승한 것이다. 이때 성리학자들이 한 일은 그러한 의례가 성리학의 세계관, 가치관과 어울리도록 하는 이론을 만들어 냄으로써 그것이 미신이 아닌 유교라고 하는 고등한 종교의 의례로 정착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19) 남효온(南孝溫): 1454(단종 2)~1492(성종 23). 조선 초기의 문신, 학자.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 본관은 의령.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벽사(碧沙).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시호는 문정(文貞).


20) 南孝溫, 「鬼神論」, 『秋江集』 권5, 37b


21) 죽은 이의 기(氣)가 곧바로 사라지지 않고 혼백(魂魄)으로 남는다고 하는 것은 고대 중국에서부터 이어져 온 전통적 사고였다. 『예기』 「제의」 편에 기록된 공자와 그의 제자의 대화에 의하면, 인간이 죽은 후 음(陰)의 기로 이루어진 체백(體魄)은 땅 속으로 스며들어 흩어지고, 양(陽)의 기인 혼기(魂氣)는 공중에서 자유롭게 떠돌다가 소멸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이른바 양혼․음백(陽魂陰魄)의 이론으로서 유교의 전통적인 사생관을 이루는 것이다.


22) 이황(李滉): 1501(연산군 7)~1570(선조 4).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 (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 시호는 문순(文純).


23) 李滉, 「答南時甫」, 『退溪集』 권14, 9a


24) 같은 글


25) 南孝溫, 「鬼神論」, 『秋江集』 권5, 36b-37a


26) 서경덕(徐敬德): 1489(성종 20)~1546(명종 1). 본관은 당성(唐城). 자는 가구(可久), 호는 복재(復齋) 또는 화담(花潭). 시호는 문강(文康).


27) 徐敬德, 「鬼神死生論」, 『花潭集』 권2, 15b


28) 李滉, 「答南時甫」, 『退溪集』 권14, 8b


29) 변화하지 않는 것과 변화하는 것을 성리학의 이원론(二元論)에서 각각 이(理)와 기(氣)로 지칭하였지만 서경덕은 그것을 동일한 하나의 기가 가지고 있는 두 가지 모습 즉 담일청허(湛一淸虛)한 본질과 취산(聚散)하는 형질로 수용하였다. 서경덕은 기일원론자(氣一元論者)로 일컬어지지만, 그의 일원론적인 기 개념 속에는 실은 정주학의 이․기(理氣) 개념에 해당하는 이원적 요소가 내포되어 이미 내포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30) 이이(李珥): 1536(중종 31)~1584(선조 17).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시호는 문성(文成).


31) 李珥, 「死生鬼神策」, 『栗谷集』 拾遺 권4, 23a)


32) 이순구, 「조선초기 여성의 신앙 생활」, 『역사학보』 150, 1996, 역사학회